목차
신경림 시모음 가난한 사랑노래, 농무(農舞), 쓰러진 것들을 위하여, 역전 사진관집 이층, 목계장터, 줄포, 낙타, 파장(罷場) 감상평
신경림은 한국 문학을 대표하는 시인으로, 그의 작품은 삶의 고뇌와 인간의 본질을 깊이 있게 탐구합니다. 다양한 시집에서 발췌한 신경림 시모음의 신경림 시인의 대표시를 통해 그의 문학 세계를 감상하고자 합니다.
신경림 시인의 시에는 그의 독특한 감성이 잘 묻어납니다. 그의 시는 주로 일상과 자연, 인간의 감정을 소재로 하며, 간결한 문체와 깊은 상징성으로 독자들에게 다양한 해석의 여지를 제공합니다. 이 글에서는 신경림 시모음을 중심으로 그의 작품 세계를 살펴보고자 합니다.
‘가난한 사랑노래‘ -신경림
‘가난한 사랑노래‘ -신경림
가난하다고 해서 외로움을 모르겠는가
너와 헤어져 돌아오는
눈 쌓인 골목길에 새파랗게 달빛이 쏟아지는데.
가난하다고 해서 두려움이 없겠는가
두 점을 치는 소리
방범대원의 호각소리 메밀묵 사려 소리에
눈을 뜨면 멀리 육중한 기계 굴러가는 소리.
가난하다고 해서 그리움을 버렸겠는가
어머님 보고 싶소 수없이 뇌어 보지만
집 뒤 감나무에 까치밥으로 하나 남았을
새빨간 감 바람소리도 그려보지만.
가난하다고 해서 사랑을 모르겠는가
내 볼에 와닿던 네 입술의 뜨거움
사랑한다고 사랑한다고 속삭이던 네 숨결
돌아서는 내 등 뒤에 터지던 네 울음.
가난하다고 해서 왜 모르겠는가
가난하기 때문에 이것들을
이 모든 것들을 버려야 한다는 것을.
'가난한 사랑노래'는 가난 속에서도 느끼는 사랑과 그리움, 외로움 등을 섬세하게 그려낸 시입니다. 가난하다고 해서 외로움, 두려움, 그리움, 사랑을 모르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가난 때문에 더 깊이 느끼고, 더 많이 버려야 하는 것들이 존재합니다. 시인은 가난 속에서도 사랑을 느끼고, 그로 인해 고통스러워하면서도 그것을 인정하고 받아들입니다. 이 시는 인간의 감정이 물질적 조건에 의해 제약받지 않음을 상기시켜 주며, 가난 속에서도 피어나는 진정한 사랑의 의미를 되새기게 합니다.
‘농무(農舞)‘
‘농무(農舞)‘
징이 울린다 막이 내렸다
오동나무에 전등이 매어달린 가설 무대
구경꾼이 돌아가고 난 텅빈 운동장
우리는 분이 얼룩진 얼굴로
학교 앞 소줏집에 몰려 술을 마신다
답답하고 고달프게 사는 것이 원통하다
꽹과리를 앞장세워 장거리로 나서면
따라붙어 악을 쓰는 건 쪼무래기들뿐
처녀애들은 기름집 담벽에 붙어 서서
철없이 킬킬대는구나
보름달은 밝아 어떤 녀석은
꺽정이처럼 울부짖고 또 어떤 녀석은
서림이처럼 해해대지만 이까짓
산구석에 처박혀 발버둥친들 무엇하랴
비료값도 안나오는 농사 따위야
아예 여편네에게나 맡겨 두고
쇠전을 거쳐 도수장 앞에 와 돌 때
우리는 점점 신명이 난다
한 다리를 들고 날나리를 불꺼나
고갯짓을 하고 어깨를 흔들꺼나.
- 농사꾼 대서쟁이 김장순씨에게
'농무'는 농촌에서의 삶의 고달픔과 고통을 솔직하게 그려낸 작품입니다. 징이 울리고 막이 내린 운동장에서, 소줏집에 몰려 술을 마시는 농민들의 모습이 그려집니다. 농사를 지으며 고단한 삶을 살아가는 이들의 분노와 좌절, 그리고 그것을 잊기 위한 신명 넘치는 농무가 펼쳐집니다. 시인은 농민들의 고통을 적나라하게 묘사하며, 그들의 삶의 애환을 공감하게 합니다.
‘쓰러진 것들을 위하여‘
‘쓰러진 것들을 위하여‘
아무래도 나는 늘 음지에 서 있었던 것 같다
개선하는 씨름꾼을 따라가며 환호하는 대신
패배한 장사 편에 서서 주먹을 부르쥐었고
몇십만이 모이는 유세장을 마다하고
코흘리개만 모아놓은 초라한 후보 앞에서 갈채했다
그래서 나는 늘 슬프고 안타깝고 아쉬웠지만
나는 불행하다고 생각한 일이 없다
나는 그러면서 행복했고
사람 사는 게 다 그러려니 여겼다
쓰러진 것들의 조각난 꿈을 이어주는
큰 솜이 있다고 결코 믿지 않으면서도
- 사진관집 이층
'쓰러진 것들을 위하여'는 패배자와 약자에 대한 공감과 연대를 그린 시입니다. 시인은 항상 음지에 서서 패배한 이들을 응원하며, 그들의 슬픔과 아쉬움을 함께 나눕니다. 개선하는 이들을 따라가며 환호하지 않고, 초라한 후보 앞에서 갈채를 보내는 시인의 모습은, 인간의 진정한 연대와 공감의 가치를 일깨워 줍니다.
‘역전 사진관집 이층‘
‘역전 사진관집 이층‘
사진관집 이층에 하숙을 하고 싶었다.
한밤에도 덜커덩덜커덩 기차가 지나가는 사진관에서
낙타와 고래를 동무로 사진을 찍고 싶었다
아무 때나 나와 기차를 타고 사막도 바다도 갈 수 있는,
누군가 날 기다리고 있을 그 먼 곳에 갈 수 있는,
어렸을 때 나는 역전 그 이층에 하숙을 하고 싶었다.
이제는 꿈이 이루어져 비행기를 타고
사막도 바다도 다녀봤지만, 나는 지금 다시
그 삐걱대는 다락방에 가 머물고 싶다.
아주 먼 데서 찾아왔을 그 사람과 함께 누워서
덜컹대는 기차 소리를 듣고 싶다.
양철지붕을 두드리는 소낙비 소리를 듣고 싶다.
낙타와 고래를 배경으로 사진을 찍고 싶다.
다락방을 나와 함께 기차를 타고 싶다.
그 사람이 날 찾아온 길을 되짚어가면서
어두운 그늘에도 젖고 눈부신 햇살도 쬐고 싶다.
그 사람의 지난 세월 속에 들어가
젖은 머리칼에 어른대는 달빛을 보고 싶다.
살아보지 못한 새로운 세상으로 가는 첫날을
다시 그 삐걱대는 사진관집 이층에 가 머물고 싶다.
- 사진관집 이층( 창비, 2014)
'역전 사진관집 이층'은 어린 시절의 꿈과 현실을 교차시키며, 과거의 소박한 꿈을 되돌아보는 시입니다. 어렸을 때 역전 사진관집 이층에서 하숙하며 낙타와 고래를 배경으로 사진을 찍고 싶었던 꿈은, 비행기를 타고 세상을 다녀온 현재에도 여전히 소중한 기억으로 남아 있습니다. 시인은 다시 그 시절로 돌아가 덜컹대는 기차 소리와 소낙비 소리를 들으며, 단순하고 순수했던 꿈을 되찾고 싶어 합니다.
‘목계장터‘
‘목계장터‘
하늘은 날더러 구름이 되라 하고
땅은 날더러 바람이 되라 하네
청룡 흑룡 흩어져 비 개인 나루
잡초나 일깨우는 잔바람이 되라네
뱃길이라 서울 사흘 목계 나루에
아흐레 나흘 찾아 박가분\* 파는
가을볕도 서러운 방물장수 되라네
산은 날더러 들꽃이 되라 하고
강은 날더러 잔돌이 되라 하네
산서리 맵차거든 풀속에 얼굴 묻고
물여울 모질거든 바위 뒤에 붙으라네
민물 새우 끓어넘는 토방 툇마루
석삼년에 한 이레쯤 천치로 변해
짐부리고 앉아 쉬는 떠돌이가 되라네
하늘은 날더러 바람이 되라 하고
산은 날더러 잔돌이 되라 하네
'목계장터'는 한적한 시골 장터의 모습을 담고 있습니다. 하늘은 구름이 돼라 하고, 땅은 바람이 되라 하는 시인의 독백 속에서 자연과 인간의 조화를 느낄 수 있습니다. 강물과 산서리, 잡초와 잔돌 같은 자연 요소들을 통해 인간의 작은 존재감을 강조하며, 자연 속에서 인간이 어떻게 살아가는지를 그려냅니다. 이 시는 소박한 자연의 모습을 통해 삶의 단순함과 순수함을 상기시켜 줍니다.
‘줄포‘
‘줄포‘
뻘밭에 갈매기만 끼룩대는 폐항
길다란 장터 끝머리에 있는 이층 대서방은
종일 불기가 없어도 훈훈하다
사람들은 돈 대신
막걸리 한 주전자씩을 들고 와
진정서와 고발장을 써 받고
대서사는 묵은 잡지 뒤숭숭한 시렁에서
마른 북어를 안주로 꺼내놓고 한마디한다
사람은 착하게 사는 게 제일이랑께
그저 착하게 사는 게 제일이랑께
그래서 줄포 폐항의 기다란 장터
술집에서 사람들은 나그네더라도 말한다
사람은 착한 게 제일이랑께
그저 착하게 사는 게 제일이랑께
- 길, 창비, 1990.
'줄포'는 전북의 작은 항구 마을을 배경으로 한 시입니다. 폐항이 되어버린 줄포의 쓸쓸한 분위기 속에서, 사람들은 막걸리를 들고 와 진정서와 고발장을 쓰는 대서방의 모습을 그립니다. 돈 대신 막걸리를 들고 오는 사람들, 그리고 "사람은 착하게 사는 게 제일이라니까"라는 대서사의 말은, 작은 마을의 인간미와 따스함을 느끼게 합니다. 이 시는 한때 번성했으나 이제는 쇠락한 마을의 현실을 담담하게 그려내며, 사람들의 소박한 삶을 따뜻하게 조명합니다.
'낙타'
'낙타'
낙타를 타고 가리라, 저승길은
별과 달과 해와
모래밖에 본 일이 없는 낙타를 타고.
세상사 물으면 짐짓, 아무것도 못 본 체
손 저어 대답하면서,
슬픔도 아픔도 까맣게 잊었다는 듯.
누군가 있어 다시 세상에 나가란다면
낙타가 되어 가겠다 대답하리라.
별과 달과 해와
모래만 보고 살다가,
돌아올 때는 세상에서 가장
어리석은 사람 하나 등에 업고 오겠노라고.
무슨 재미로 세상을 살았는지도 모르는
가장 가엾은 사람 하나 골라
길동무 되어서.
'낙타'는 죽음과 삶, 그리고 존재의 의미를 탐구하는 시입니다. 시인은 저승길을 상징하는 낙타를 타고 가며, 삶의 고통과 슬픔을 모두 잊은 듯이 무덤덤하게 그 길을 갑니다. 별과 달, 해와 모래만을 본 낙타처럼 단조로운 삶을 살아가는 모습이 그려집니다. 이 시에서 신경림은 인생의 무상함과 동시에 인간의 어리석음을 비유적으로 드러내고 있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가엾은 사람을 길동무 삼아 돌아오겠다는 결말은, 인생의 진정한 의미를 깨닫지 못한 채 살아가는 이들의 슬픔을 대변합니다.
‘파장(罷場)’
‘파장(罷場)’
못난 놈들은 서로 얼굴만 봐도 흥겹다
이발소 앞에 서서 참외를 깎고
목로에 앉아 막걸리를 들이키면
모두들 한 결 같이 친구 같은 얼굴들
호남의 가뭄 얘기 조합 빚 얘기
약장사 기타 소리에 발장단을 치다보면
왜 이렇게 자꾸만 서울이 그리워지나
어디를 들어가 섰다라도 별일까
주머니를 털어 색시 집에라도 갈까
학교 마당에들 모여 소주에 오징어를 찢다
어느새 긴 여름 해도 저물어
고무신 한 결레 또는 조기 한 마리 들고
달이 환한 마찻길을 절뚝이는 파장
'파장'은 농촌 사회의 일상을 생생하게 그려낸 작품입니다. 이발소 앞에서 참외를 깎고 막걸리를 마시며 사는 이들의 소박한 일상 속에서, 서울에 대한 그리움이 묻어납니다. 구체적인 이미지와 생동감 넘치는 표현을 통해 독자는 시골의 정취를 생생하게 느낄 수 있습니다. 시골에서 느끼는 외로움과 함께, 서울로의 탈출을 꿈꾸는 소시민의 애환을 담고 있습니다. 그들은 서로의 존재만으로도 위안을 얻고, 서울을 그리워하면서도 현재의 삶을 묵묵히 살아갑니다.
‘나의 예수‘
‘나의 예수‘
그의 가난과 추위가 어디 그만의 것이랴.
그는 좁은 어깨와 야윈 가슴으로 나의 고통까지 떠안고
역 대합실에 신문지를 덮고 누워 있다.
아무도 그를 눈여겨보지 않는다.
간혹 스치는 것은 모멸과 미혹의 눈길뿐.
마침내 그는 대합실에서도 쫓겨나 거리를 방황하게 된다.
찬 바람이 불고 눈발이 치는 날 그의 영혼은 지상에서 사라질 것이다.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를 걸어올라가 못 박히는 대신
그의 육신은 멀리 내쫓겨 광야에서 눈사람이 되겠지만.
그 언 상처에 손을 넣어보지 않고도
사람들은 그가 부활하리라는 것을 의심치 않을 것이다.
다시 대합실에 신문지를 덮고 그들을 대신해서 누워 있으리라는 걸.
그들의 아픔, 그들의 슬픔을 모두 끌어안고서.
- 사진관집 이층
'나의 예수'는 가난과 고통 속에서 살아가는 예수의 모습을 통해 사회적 약자의 고통을 형상화한 시입니다. 대합실에서 신문지를 덮고 누워있는 예수는 나의 고통을 떠안고 있지만, 사람들은 그의 고통을 외면합니다. 결국 그는 거리로 쫓겨나고, 극한의 고통 속에서 사라져 갑니다. 그러나 시인은 예수가 다시 돌아와 그들의 아픔과 슬픔을 끌어안을 것이라는 믿음을 표현합니다. 이 시는 현대 사회의 무관심과 냉담함을 비판하며, 진정한 연대와 공감의 필요성을 강조합니다.
‘다시 느티나무가‘
‘다시 느티나무가’
고향집 앞 느티나무가
터무니없이 작아 보이기 시작한 때가 있다
그때까지는 보이거나 들리던 것들이
문득 보이지도 들리지도 않는다는 것을 알면서
나는 잠시 으아해하기는 했으나
내가 다 커서거니 여기면서
이게 다 세상 사는 이치라고 생각했다
오랜 세월이 지나 고향엘 갔더니
고향집 앞 느티나무가 옛날처럼 커져 있다
내가 늙고 병들었구나 이내 깨달았지만
내 눈이 이미 어두워지고 귀가 멀어진 것을
나는 서러워하지 않았다
다시 느티나무가 커진 눈에
세상이 너무 아름다웠다
눈이 어두워지고 귀가 멀어져
오히려 세상의 모든 것이 더 아름다웠다
- [사진관집 이층], 창비, 2014.
'다시 느티나무가'는 시간이 흐름에 따라 변화하는 고향의 모습을 담고 있습니다. 어린 시절 커 보였던 느티나무가 작아 보이기 시작한 순간, 그리고 다시 고향에 돌아와 느티나무가 커 보이는 순간, 시인은 인생의 변화를 깨닫습니다. 나이가 들고, 눈과 귀가 어두워지면서 오히려 세상의 아름다움을 더 깊이 느끼게 되는 아이러니를 담고 있습니다. 이 시는 인생의 순환과 변화를 통해 삶의 깊이를 깨닫게 합니다.
‘세밑‘
‘세밑’
흔들리는 버스 속에서 뒤돌아본다.
푸섶길의 가없음을 배우고
저녁노을의 아름다움을 배우고
새소리의 기쁨을 비로소 안 한 해를,
비탈길을 터벅거리며 뒤돌아본다.
저물녘 내게 몰아쳐온 이 바람,
무엇인가, 송두리째 나를 흔들어 놓는
이 폭풍 이 바람은 무엇인가,
눈도 귀도 멀게 하는, 해도 달도
멎게 만드는 이것은 무엇인가.
자리에 누워 뒤돌아본다,
만나는 일의 설레임을 알고
마주 보는 일의 뜨거움을 알고
헤어지는 일의 아픔을 처음 안 한 해를,
꿈 속에서 다시 뒤돌아본다,
삶의 뜻을 또 새로 본 이 한 해를.
'세밑'은 한 해를 마무리하며 뒤돌아보는 시입니다. 푸섶길과 저녁노을, 새소리 등을 통해 자연의 아름다움을 배우고, 인생의 소중함을 깨닫게 됩니다. 비탈길을 터벅거리며, 만남의 설렘과 마주 보는 뜨거움, 헤어짐의 아픔을 처음 알게 된 한 해를 뒤돌아보며, 삶의 뜻을 새로이 깨닫습니다. 이 시는 한 해를 돌아보며 자신을 성찰하고, 새롭게 다짐하는 시간을 의미합니다.
‘누구일까 ‘
‘누구일까’
스나미에 온 가족이 쓸려나간 가운데 개 한마리가 살아남았다.
카메라에 잡혔다.
조용한 바다를 배경으로,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 고였다.
무엇인가 말하고 싶다고, 그 눈은 말한다.
답답하다는 듯, 고개를 좌로 다시 우로 돌린다.
누구일까, 개로 하여금 하고 싶은 말을 못하게 하는 그는.
또 사람한테 개의 말을 들을 능력을 갖지 못하게 한 그는.
- 사진관집 이층
'누구일까'는 쓰나미로 인해 가족을 잃은 개의 모습을 통해 인간과 동물의 고통을 대조적으로 그려냅니다. 개의 눈물과 답답함은 인간의 무력함을 상징하며, 개의 말을 들을 수 없는 인간의 한계를 드러냅니다. 이 시는 자연재해 속에서 인간과 동물 모두가 겪는 고통을 통해, 우리 사회의 연대와 공감을 촉구합니다.
‘설중행(雪中行)‘
‘설중행(雪中行)‘
눈 속으로 눈 속으로 걸어들어가니 산이 있고 논밭이 있고 마을이 있고,
내가 버린 것들이 모여 눈을 맞고 있다.
어떤 것들은 반갑다 알은체를 하고 또 어떤 것들은 섭섭하다 외면을 한다.
나는 내가 그것들을 버린 것이 아니라 그것들이 나를 버렸다고 강변하면서,
눈 속으로 눈 속으로 걸어들어가다가 내가 버린 것들 속에 섞여 나도 버려진다.
나로부터 버려지고 세상으로부터 버려진다.
눈 속으로 눈 속으로 걸어들어가면서 나는 한없이 행복하다.
내가 버린 것들 속에 섞여 버려져서 행복하고 나로부터 버려져셔 행복하다.
- 사진관집 이층
'설중행'은 눈 속을 걸어가며 자신이 버린 것들과 다시 만나고, 결국 자신도 버려지는 과정을 그린 시입니다. 눈 속에서 버려진 것들과 섞여 행복을 느끼며, 자신을 버리고 세상을 버리며 얻는 평온함을 표현합니다. 이 시는 버림으로써 얻는 해방과 자유, 그리고 그것이 가져다주는 행복을 담고 있습니다.
신경림의 시들은 인간의 고통과 슬픔, 그리고 소박한 삶의 아름다움을 깊이 있게 그려내며, 독자들에게 깊은 공감과 감동을 줍니다. 그의 시는 삶의 본질을 탐구하며, 인간의 존재를 성찰하게 합니다.
갈대
‘갈대’
언제부터 갈대는 속으로
조요히 울고 있었다
그런 어느 밤이었을 것이다 갈대는
그의 온몸이 흔들리고 있는 것을 알았다
바람도 달빛도 아닌 것
갈대는 저를 흔드는 것이 제 조용한 울음인 것을
까맣게 몰랐다
--산다는 것은 속으로 이렇게
조용히 울고 있는 것이란 것을
그는 몰랐다.
"갈대"는 신경림 시인의 대표적인 시 중 하나로, 갈대가 흔들리는 모습을 통해 인간의 내면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시인은 갈대가 흔들리는 이유를 바람이나 달빛이 아닌, 갈대 스스로의 조용한 울음으로 묘사합니다. 이는 인간이 외부의 요인 때문에 흔들리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내면의 울음 때문이라는 것을 암시합니다. 결국 "산다는 것은 속으로 이렇게 조용히 울고 있는 것"이라는 구절은 삶의 고독과 내면의 아픔을 상징적으로 드러냅니다.
돌 하나, 꽃 한 송이
‘돌 하나, 꽃 한 송이‘ - 신경림 시
꽃을 좋아해 비구 두엇과 눈 속에 핀 매화에 취해도 보고
개망초 하얀 간척지 농투성이 농성에 덩달아도 보고
노래가 좋아 기성화장수 봉고에 실려 반도 횡단도 하고
버려진 광산촌에서 중로의 주모와 동무로 뒹굴기도 하고
이래서 이 세상에 돌로 버려지면 어쩌나 두려워하면서
이래서 이 세상에 꽃으로 피었으면 꿈도 꾸면서
"돌 하나, 꽃 한 송이"는 꽃과 돌이라는 상반된 이미지를 통해 삶의 양면성을 표현합니다. 시인은 꽃을 좋아해도, 돌로 버려질까 두려워하며, 꽃으로 피기를 꿈꾸기도 합니다. 이 시는 인생의 불확실성과 인간의 내면에 존재하는 희망과 두려움을 동시에 담고 있습니다. 시인은 인생이 꽃처럼 아름답기도 하지만, 때로는 돌처럼 무거운 현실을 마주해야 한다고 이야기합니다.
4월 19일, 시골에 와서
‘4월 19일, 시골에 와서‘ - 신경림 시
밤새워 문짝이 덜컹대고
골목을 축축한 바람이 쓸고 있다.
헐린 담장에 어수선한 두엄더미 우에
살구꽃이 피고 어지럽게
피어서 꺾이고 밟히고
그래도 다시 피는 4월.
나는 남한강 상류 외진 읍내에 와서
통금도 없는 빈 거리를 헤매면서
어느새 잊어버린
그날의 함성을 생각했다.
티끌처럼 쏠리며 살아온 나날.
돌처럼 뒹굴며 이어온 세월.
다시 그날의 종소리가 들리라고
아무도 믿지 않는 밤은 어두웠다.
친구를 생각했다. 찬 돌에 이마를 대고
깊은 잠이 들었을 친구를
그 손톱에 배었을 핏자국을.
4월이 와도 바람은 그냥 차고
살구꽃이 피어도 흐느낌은 더 높은데
축축한 바람은 꽃가지에 와 매달려
친구들의 울음처럼 잉잉댔다.
진달래도 개나리도 피고
꺾이고 밟히고 다시 피는 4월
밤은 좀체 밝아오지 않았다.
- 여름날(미래사, 1991)
이 시는 4월의 시골 풍경을 배경으로, 그날의 함성과 친구를 떠올리며 4월의 의미를 되새깁니다. 살구꽃이 피고 지는 모습을 통해 인생의 덧없음을 표현하며, 친구의 기억을 통해 과거의 아픔과 슬픔을 회상합니다. 이 시에서 4월은 희망과 재생의 달임에도 불구하고, 아직 어두운 밤이 계속되는 것을 통해 현실의 어려움을 강조합니다.
집으로 가는 길
‘집으로 가는 길’
가볍게 걸어가고 싶다.
석양 비낀 산길을.
땅거미 속에 긴 그림자를 묻으면서.
주머니에 두 손을 찌르고
콧노래 부르는 것도 좋을 게다.
지나고 보면 한결같이 빛 바랜 수채화 같은 것.
거리를 메우고 도시에 넘치던 함성도.
물러서지 않으리라 굳게 잡았던 손들도.
모두가 살갗에 묻은 가벼운 티끌 같은 것.
수백 밤을 눈물로 새운 아픔도.
가슴에 피로 새긴 증오도.
가볍게 걸어가고 싶다.
그것들 모두 땅거미 속에 묻으면서.
내가 스쳐온 모든 것들을 묻으면서.
마침내 나 스스로 그 속에 묻히면서.
집으로 가는 석양 비낀 산길을.
"집으로 가는 길"에서는 가볍게 걸어가며 지나온 모든 것을 뒤로하고 싶은 마음을 표현합니다. 시인은 석양 비낀 산길을 걸으며, 모든 것을 땅거미 속에 묻고자 합니다. 이는 과거의 아픔과 상처를 잊고 새로운 시작을 바라는 마음을 나타냅니다. 시인은 인생의 여러 순간들을 회상하며, 그 모든 것이 결국은 한낱 티끌 같은 것임을 깨닫습니다.
떠도는 자의 노래
‘떠도는 자의 노래‘
외진 별정우체국에 무엇인가를 놓고 온 것 같다
어느 삭막한 간이역에 누군가를 버리고 온 것 같다
그래서 나는 문득 일어나 기차를 타고 가서는
눈이 펑펑 쏟아지는 좁은 골목을 서성이고
쓰레기들이 지저분하게 널린 저잣거리도 기웃댄다
놓고 온 것을 찾겠다고
아니. 이미 이 세상에 오기 전 저 세상 끝에
무엇인가를 나는 놓고 왔는지도 모른다
쓸쓸한 나룻가에 누군가를 버리고 왔는지도 모른다
저 세상에 가서도 다시 이 세상에
버리고 간 것을 찾겠다고 헤매고 다닐는지도 모른다
"떠도는 자의 노래"는 외진 별정우체국과 간이역에서 무엇인가를 놓고 온 것 같은 느낌을 표현합니다. 시인은 놓고 온 것을 찾기 위해 기차를 타고, 눈이 펑펑 쏟아지는 좁은 골목을 서성입니다. 이 시는 인생에서 무언가 중요한 것을 잃어버린 듯한 공허함과 그리움을 담고 있습니다. 시인은 이 세상에 오기 전 저 세상에서도 무언가를 놓고 왔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며, 끊임없이 무언가를 찾아 헤매는 삶의 여정을 그립니다.
저 소리는 어디에서
‘저 소리는 어디에서‘
다리도 못 펴고 누워 있는 초췌한 몸 속에서 나오는
소리가 아니다
미라가 다 되어 마지막 숨을 몰아쉬는 육신 속에서 나
오는 소리가 아니다
이승과의 인연을 외면하여 밀폐된 검은 관 속에서 나
오는 소리가 아니다
드디어 뗏장이 입혀진 어둡고 축축한 무덤 속에서 나
오는 소리가 아니다
나비가 떼지어 나는 소리도 함께 들리는
가지각색 꽃들의 빛깔과 향기도 따라 보이는
"어머니"부르면 "그래" 대답하는 저 맑고 담담한 소
리는
이 시는 다양한 소리를 통해 삶과 죽음을 묘사합니다. 시인은 초췌한 몸속, 미라가 되어가는 육신, 밀폐된 관 속, 어둡고 축축한 무덤 속에서 나오는 소리를 상상합니다. 하지만 진정한 소리는 "어머니"를 부를 때 "그래"라고 대답하는 맑고 담담한 소리로, 이는 인간의 깊은 감정과 연결된 소리입니다. 이 시는 인간의 본질적인 감정과 그 소리를 통해 삶의 의미를 탐구합니다.
지상에 새롭지 않은 것은 없다
‘지상에 새롭지 않은 것은 없다‘
이사할 적에는 새 바람 새 빛을 바랐나보다.
그래서 나는 실망한다. 십칠년 만에 이사한 동네가
옛날에 떠났던 바로 그 동네여서.
그래도 반가워서 이 언덕 저 골목 서성이는데
놀랍구나, 모든 게 이렇게 새롭다니.
아기들이 새롭다, 연립주택 낡은 문을 밀고 나오는.
젊은 엄마들이 새롭다, 뒤따라 나오는 헐렁한 옷 속의.
그루터기가 새롭다, 가지 잘린 플라타너스의.
간판이 새롭다, 새로 단장한 머리방의.
새롭지 않은 것은 오직, 오래되고 낡은 것들 속에서
새로운 것을 찾아 걷는 내 걸음뿐.
"지상에 새롭지 않은 것은 없다"는 일상 속에서 새로움을 발견하는 시인의 시각을 담고 있습니다. 이사한 동네가 예전에 떠났던 동네와 같아 실망하지만, 아기들, 젊은 엄마들, 가지 잘린 플라타너스 등에서 새로움을 발견합니다. 이 시는 일상에서의 새로움과 그 속에서의 발견을 통해 삶의 변화를 묘사합니다. 시인은 오래되고 낡은 것들 속에서도 새로운 것을 찾으려는 자신을 자각하며, 그 속에서 느끼는 신선함을 표현합니다.
아버지의 그늘
‘아버지의 그늘‘ - 신경림 시
특하면 아버지는 오밤중에
취해서 널브러진 색시를 업고 들어왔다,
어머니는 입을 꾹 다문 채 술국을 끓이고
할머니는 집안이 망했다고 종주먹질을 해댔지만,
며칠이고 집에서 빠져나가지 않는
값싼 향수내가 나는 싫었다
아버지는 종종 장바닥에서
품삯을 못 받은 광부들한테 멱살을 잡히기도 하고,
그들과 어울려 핫바지춤을 추기도 했다,
빚 받으러 와 사랑방에 죽치고 앉아 내게
술과 담배 심부름을 시키는 화약장수도 있었다.
아버지를 증오하면서 나는 자랐다,
아버지가 하는 일은 결코 하지 않겠노라고
이것이 내 평생의 좌우명이 되었다,
나는 빚을 질 일을 하지 않았다,
취한 색시를 업고 다니지 않았고,
노름으로 밤을 지새지 않았다,
아버지는 이런 아들이 오히려 장하다 했고
나는 기고만장했다, 그리고 이제 나도
아버지가 중풍으로 쓰러진 나이를 넘었지만,
나는 내가 잘못했다고 생각한 일이 없다,
일생을 아들의 반면교사로 산 아버지를
가엽다고 생각한 일도 없다, 그래서
나는 늘 당당하고 떳떳했는데 문득
겨울을 쳐다보다가 놀란다, 나는 간 곳이 없고
나약하고 소심해진 아버지만이 있어서,
취한 색시를 안고 대낮에 거리를 활보하고,
호기있게 광산에서 돈을 뿌리던 아버지 대신,
그 거울속에는 인사동에서도 종로에서도
제대로 기 한번 못 펴고 큰 소리 한번 못 치는
늙고 초라한 아버지만이 있다.
"아버지의 그늘"은 아버지와의 관계를 통해 인생의 굴레를 그립니다. 아버지의 실수를 반면교사로 삼아 살아왔지만, 결국 자신도 아버지와 같은 운명을 따라가게 됨을 깨닫습니다. 시인은 아버지를 증오하며 자랐지만, 나이가 들면서 자신도 아버지의 그림자에서 벗어나지 못했음을 자각합니다. 이 시는 가족 간의 복잡한 감정과 인생의 반복성을 통해 인간의 숙명적인 부분을 드러냅니다.
그녀네 집이 멀어서
‘그녀네 집이 멀어서‘
그녀네 집이 멀어서
북적대는 시게전을 지나야 한다
골목을 벗어나면 언덕이 있고
싸리울 하얀 꽃 속에 그녀는 산다
방은 늘 비어 있어 어른대는
살구꽃에 취해 잠이 들었다 눈을 뜨면
꽃 그림자가 방문을 덮는다
그녀네 집이 너무 멀어서
물 머금은 보름달을 등에 지고
내려오는 길은 더욱 멀다
골목을 벗어나고 시게전을 지나서
외진 모퉁이 들여다보면
꼬치집에도 그녀는 없다
기다리며 구석에 앉아 술을 마시다가
갑자기 나는 잊는다 그녀의 얼굴을
체취를 잊고 이름을 잊는다
그녀네 집에 멀어서
시게전을 잊고 유행가가 자욱한 골목을 잊고
싸리울 하얀 빈 방을 잊고 비릿한 이불자락을 잊고.....
당초부터 이 세상에 없는지도 모를
그녀네 집이 너무 멀어서.
- <어머니와 할머니의 실루엣>
"그녀네 집이 멀어서"는 먼 거리에 있는 그녀를 그리워하는 시인의 마음을 담고 있습니다. 북적대는 시장과 골목을 지나 언덕을 넘어 그녀의 집에 도착하지만, 방은 늘 비어 있습니다. 시인은 그녀의 얼굴과 체취를 잊어버리며, 그녀의 집이 너무 멀어 그리움이 더욱 커져갑니다. 이 시는 거리와 그리움, 그리고 그 속에서의 상실감을 통해 사랑의 복잡한 감정을 표현합니다.
우리의 소원
‘우리의 소원‘
나의 소원은 따끈한 밥 한 그릇
어머니와 함께 할 따끈한 밥 한 그릇
나의 소원은 전세방 한 칸
잠도 자고 꿈도 꿀 작은 방 하나
나의 소원은 편안한 하루
언니 오빠 함께 쉴 조용한 하루
나의 소원은 아늑한 일터
눈 부라리는 이 없는 화목한 일터
노래하며 함께 일할 정다운 동무
말하지 말라 모두들 네 편이라고
신문에 실릴 이름 석자 위해
족보에 오를 서푼짜리 벼슬을 위해
거짓웃음으로 턱이 굳어 있으면서
자기 아들딸만의 행복을 위해서
자기 가족만의 안녕을 위해서
모두 잠든 밤에 홀로 한숨 쉬면서
우리의 소원은 따스한 나라
네 꿈 내 꿈 이루게 할 즐거운 나라
우리의 소원은 밝은 세상
속임수 안 통하는 신나는 세상.
"우리의 소원"은 소박한 소망들을 나열하며, 그것들이 이루어지는 나라를 꿈꿉니다. 따뜻한 밥 한 그릇, 전세방 한 칸, 편안한 하루, 아늑한 일터와 같은 일상적인 소망들이 모여 이루는 세상을 그립니다. 이 시는 개인의 소박한 소망들이 모여 밝고 신나는 세상을 만들 수 있음을 암시하며, 공동체의 중요성을 강조합니다.
더딘 느티나무
‘더딘 느티나무‘
할아버지는 두루마기에 지팡이를 짚고
훠이훠이 바람처럼 팔도를 도는 것이 꿈이었다
집에서 장터까지 장터에서 집까지 비칠걸음을 치다가
느티나무 한그루를 심고 개울을 건너가 묻혔다
할머니는 산을 넘어 대처로 나가 살겠노라 노래삼았다
가마솥을 장터까지 끌고 나가 틀국수집을 하다가
느티나무가 다섯자쯤 자라자 할아버지 곁에 가 묻혔다
아버지는 큰돈을 잡겠다며 늘 허황했다
광산으로 험한 장사로 노다지를 찾아 허둥댄 끝에
안양 비산리 산비알집에 중풍으로 쓰러져 앓다가
터덜대는 장의차에 실려 할아버지 발치에 가 누웠다
그 사이 느티나무는 겨우 또 다섯자가 자랐다
내 꿈은 좁아빠진 느티나무 그늘에서 벗어나는 것이었다
그래서 강을 건너 산을 넘어 한껏 내달려 스스로
할아버지와 할머니와 아버지와 다른 사람이 되었다
나는 그런 자신이 늘 대견하고 흐뭇했다
하지만 나도 마침내 산을 넘어 강을 건너 하릴없이
할아버지와 할머니와 아버지 발치에 가 묻힐 때가 되었다
나는 그것이 싫어 들입다 내달리지만
느티나무는 참 더디게도 자란다
"더딘 느티나무"는 느리게 자라는 느티나무를 통해 인생의 과정을 묘사합니다. 할아버지, 할머니, 아버지, 그리고 자신이 각각 느티나무 아래에 묻히는 과정을 통해 세대 간의 연속성을 그립니다. 시인은 자신이 달라졌다고 생각하지만, 결국은 같은 운명을 따라가게 됨을 깨닫습니다. 이 시는 느리게 자라는 느티나무를 통해 인생의 느림과 그 속에서의 성장을 표현합니다.
소장수 신정섭 씨
’소장수 신정섭씨‘
영흥도에서 만난 소장수 신정섭씨는
꼭 세 마디만 가지고 소를 몬다
고삐 당겨 이랴이랴로 끌고
딴 곳으로 가려는 소 어뎌어뎌로 막고
힘들어 숨차하면 워워로 세운다
소장수 신정섭씨는 뭐든지 다 안다
소 눈만 끔뻑해도 가려운 데 어덴 줄 알고
귀만 쫑긋해도 아픈 데 어덴 줄 안다
소 몰고 가는 길 어데쯤
도랑이 있고 돌이 박힌 것도 훤히 알고
길에서 만나는 남의 소 나이며
성질까지도 담박 안다
그래서 소장수 신정섭씨는 세 마디만 가지고
세상을 몰겠다는 사람들이 밉다
백성의 어데가 아프고
어데가 가려운 줄도 모르면서
이랴이랴로 끌고 어뎌어뎌로만 다스리려는
어리석은 사람들이 밉다 못해 가엾다
어디에 물이 있고
어디에 불이 있는 줄도 모르면서
워워로만 막으려는 사람들이
가엾다 못해 불쌍하다
세 마디만 가지고 세상을 몰려다가
물고문 불고문으로 사람을 잡고
몽둥이질 발길질로 나라를 잡고
마침내 성고문으로 스스로 짐승이 된
얼빠진 사람들을 모조리 잡아다가
뭐든지 아는 소장수 신정섭씨는
그 아들딸까지 모조리 잡아다가
한 백 년쯤 소장수를 시키고 싶다
여름 겨울 없이 섬을 떠도는
한 천 년쯤 소장수를 시키고 싶다
단 세 마디로 거꾸로 소한테 끌려다니는
순하디순한 소가 되게 하고 싶다
이랴이랴 어뎌어뎌 워워 세 마디로 소를 몰면서.
"소장수 신정섭 씨"는 소를 다루는 소장수의 지혜를 통해 인간 사회를 비판합니다. 세 마디 말로 소를 다루는 신정섭 씨는 소의 상태를 정확히 알고 다루지만, 세 마디 말로 사람을 다루려는 이들을 비판합니다. 이 시는 단순한 지혜와 경험의 중요성을 강조하며, 무지한 사람들의 어리석음을 드러냅니다.
그림
그림‘ - 신경림 시
옛사람의 그림 속으로
들어가고 싶은 때가 있다
배낭을 멘 채 시적시적
걸어들어가고 싶은 때가 있다
주막집도 들어가보고
색시들 수놓는 골방문도 열어보고
대장간에서 풀무질도 해보고
그러다가 아예 나오는 길을
잃어버리면 어떨까
옛사람의 그림 속에
갇혀버리면 어떨까
문득 깨달을 때가 있다
내가 오늘의 그림 속에
갇혀 있다는 것을
나가는 길을 잃어버렸다는 것을
두드려도 발버둥쳐도
문도 길도
찾을 수 없다는 것을
오늘의 그림에서
빠져나가고 싶을 때가 있다
배낭을 메고 밤차에 앉아
지구 밖으로 훌쩍
떨어져나가고 싶을 때가 있다
- <길>, 창작과비평사, 1990
"그림"은 옛사람의 그림 속으로 들어가고 싶은 시인의 소망을 담고 있습니다. 배낭을 메고 그림 속으로 들어가 다양한 경험을 하고 싶어 하는 시인은 결국 오늘의 그림 속에 갇혀 있음을 깨닫습니다. 이 시는 일상의 제약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소망과 그 속에서의 현실을 표현합니다.
고장 난 사진기
‘고장난 사진기‘ - 신경림 시
나는 늘 사진기를 들고 다닌다
보이는 것은 모두 찍어
내가 보기를 바라는 것도 찍히고 바라지 않는 것도 찍는다
현상해보면 늘 바라던 것만이 나와 있어 나는 안심한다
바라지 않던 것이 보인 것은 환시였다고
나는 너무 오랫동안 알지 못했다 내 사진기는
내가 바라는 것만을 찍어주는 고장난 사진기였음을
한동안 당황하고 주저하지만
그래도 그 사진기를 나는 버리지 못하고 들고 다닌다
고장난 사진기여서 오히려 안심하면서
- <어머니와 할머니의 실루엣>.
- 창작과비평사.1998
"고장 난 사진기"는 시인이 바라던 것만 찍히는 고장난 사진기를 통해 인간의 주관성을 드러냅니다. 시인은 자신이 바라는 것만 보이는 사진기를 들고 다니며 안심하지만, 결국 그것이 고장난 것임을 깨닫습니다. 이 시는 인간의 주관적 시각과 그 속에서의 안심을 통해 현실의 불완전성을 표현합니다.
이처럼 신경림 시인의 시는 일상과 자연, 인간의 감정을 섬세하게 그리며, 독자들에게 깊은 여운을 남깁니다. 그의 시는 간결한 문체 속에 깊은 상징성을 담고 있으며, 삶의 다양한 면모를 탐구합니다.
‘별’
‘별‘ - 신경림 시
나이 들어 눈 어두우니 별이 보인다
반짝반짝 서울 하늘에 별이 보인다
하늘에 별이 보이니
풀과 나무 사이에 별이 보이고
풀과 나무 사이에 별이 보이니
사람들 사이에 별이 보인다
반짝반짝 탁한 하늘에 별이 보인다
눈 밝아 보이지 않던 별이 보인다
- <발견> 2014년 봄호
‘별’은 나이가 들면서 새롭게 발견한 별들의 아름다움을 그린 시입니다. 눈이 어두워지면서 오히려 별이 보이는 역설적인 상황을 통해 인생의 새로운 깨달음을 표현합니다. 시인은 서울 하늘의 별을 보며 자연의 경이로움을 다시 느끼고, 이를 통해 인간과 자연, 사람들 사이의 연결을 다시금 확인합니다. 나이가 들수록 사소한 것의 아름다움을 더 잘 인식하게 되는 경험을 시적으로 풀어낸 작품입니다.
‘나와 세상 사이에는‘
‘나와 세상 사이에는‘
철물점 지나 농방(籠房) 그 건너가 바로 이발소,
엿도가에 잇대어 푸줏간 그 옆이 호떡집, 이어
여보세요 부르면 딱부리 아줌마 눈 부릅뜨고
어서 옵쇼 내다볼 것 같은 신발가게.
처음 걷는 길인데도 고향처럼 낯이 익어.
말이 다르고 웃음이 다른 고장인데도,
서로들 사는 것이 비슷비슷해 보이고.
그러다 내 고장에 와서 나는 남이 된다,
큰길도 골목도 달라진 게 없는데도.
너무 익숙해 들여다보면 장바닥은
알아들을 수 없는 소리들로 가득하고,
술집은 표정 모를 얼굴들로 소란스럽다.
말이 같고 몸짓이 같아 오히려 낯이 서니
서로들 사는 것이 이렇게도 다른 걸까.
나와 세상 사이에는 강물이 있나보다.
먼 세상과 나를 하나로 잇는 강물이,그리고
가까운 세상과 나를 둘로 가르는 강물이.
- <낙타> 창비, 2008
이 시는 고향과 낯선 곳에서 느끼는 이질감과 친숙함을 대조적으로 그려냅니다. 철물점, 이발소, 푸줏간 등 구체적인 장소를 통해 고향의 친숙함을 묘사하고, 그와 동시에 고향에서조차 느끼는 소외감을 표현합니다. 시인은 말이 다르고 웃음이 다른 곳에서도 고향의 정취를 느끼지만, 막상 고향에서는 자신이 낯선 존재가 되어버린 느낌을 받습니다. 이는 고향이 변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자신과 세상 사이에 보이지 않는 경계가 생겼음을 의미합니다.
‘나목‘
‘나목‘ - 신경림 시
나무들이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고 서서
하늘을 향해 길게 팔을 내뻗고 있다
밤이면 손끝에 아름다운 별빛을 받아
드러낸 몸통에서 흙 속에 박은 뿌리까지
그것으로 말끔히 씻어내리는 것이겠지
터진 살갗에 새겨진 고달픈 삶이나
뒤틀린 허리에 배인 구질구질한 나날이야
부끄러울 것도 숨길 것도 없어
한밤에 내려 몸을 덮는눈 따위
흔들어 털어 다시 알몸이 되겠지만
알고 있을까 그들 때로 서로 부둥켜안고
온몸을 떨며 깊은 울음을 터뜨릴 때
멀리서 같이 우는 사람이 있다는 것을
- [시인의 시인 탐험], 월간조선사
‘나목’은 나무가 가진 고달픈 삶의 흔적을 통해 인간의 삶을 비유적으로 그린 시입니다. 나무는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채 서서 하늘을 향해 팔을 뻗고, 밤에는 별빛으로 그 고달픈 흔적을 씻어냅니다. 시인은 나무가 자신들의 고통을 숨기지 않으며, 오히려 그것을 받아들이고 떨쳐내는 모습을 통해 인간의 삶도 그렇게 받아들이고 살아가야 함을 강조합니다. 때로는 나무가 서로 부둥켜안고 우는 모습에서 인간의 연대와 공감을 느낄 수 있습니다.
‘성탄절 가까운 ‘
‘성탄절 가까운‘
살아오면서 나는 너무 많은 것을 얻었나보다
가슴과 등과 팔에 새겨진
이 현란한 무늬들이 제법 휘황한 걸 보니
하지만 나는 답답해온다 이내
몸에 걸친 화려한 옷과 갑진 장신구들이 무거워지면서
마룻장 밑에 감추어 놓았던
갖가지 색깔의 사금파리들은 어떻게 되었을까
교정의 플라타너스 나무에
무딘 주머니칼로 새겨놓은 내 이름은 남아 있을까
성탄절 가까운
교회에서 들리는 풍금소리가
노을에 감기는 저녁
살아오면서 나는 너무 많은 것을 버렸나보다
‘성탄절 가까운’은 삶의 화려함과 동시에 그 속의 고독을 담고 있는 시입니다. 시인은 화려한 옷과 장신구들이 자신을 답답하게 만들고, 어렸을 때의 소박한 꿈과 기억을 그리워합니다. 성탄절을 맞이하며, 교회에서 들려오는 풍금 소리와 함께 어린 시절의 순수함과 소박함을 되찾고자 하는 소망을 표현합니다. 이 시는 물질적인 것에서 벗어나 진정한 가치를 찾고자 하는 마음을 담고 있습니다.
‘바람 부는 날‘
‘바람부는 날‘
산동네에 부는 바람에서는
멸치 국물 냄새가 난다
광산촌 외진 정거장 가까운 대포집
손 없는 술청
연탄 난로 위에 끓어넘는
틀국수 냄새가 난다
산동네에 부는 바람에서는
기차바퀴 소리가 들린다
갯비린내 싣고 소금밭을 지나는
주을이라 군자의 협궤차 소리가 들린다
황석어젓 이고 새벽장 보러 가는
아낙네들의 북도 사투리가 들린다
산동네에 부는 바람에서는
갈대밭이 보인다
암컷 수컷 아우러져 갈갬질하는
개개비가 보이고 물총새가 보인다
강가 깊드리에서 나래질하는
옛날의 내 동무들이 보인다
바람 부는 날이면 그래서
산동네 사람들은 꿈을 꾼다
버들고리에 체나 한 짐씩 덩그머니 지고
그 옛날의 무자리되어 길 떠나는 꿈을
가세가세 흥얼대며 길 떠나는 꿈을.
‘바람부는 날’은 산동네에서 부는 바람을 통해 그곳 사람들의 일상을 생생하게 그려낸 시입니다. 멸치 국물 냄새, 기차바퀴 소리, 갈대밭의 풍경 등 구체적인 이미지를 통해 산동네 사람들의 소박한 삶을 그리고 있습니다. 이 시는 일상의 작은 순간들 속에서 꿈을 꾸고, 과거의 기억을 되새기는 사람들의 모습을 담고 있습니다. 바람을 통해 그들의 소망과 추억을 느낄 수 있습니다.
‘루항요(陋港遙)‘
‘루항요(陋港遙)‘ - 신경림 시
이제 그만둘까보다, 낯선 곳 헤매는 오랜 방황도
황홀하리라, 잊었던 옛 항구를 찾아가
발에 익은 거리와 골목을 느릿느릿 밟는다면.
차가운 빗발이 흩뿌리리, 가로수와 전선을 울리면서.
꽁치 꼼장어 타는 냄새 비릿한 목로에서는
낯익은 얼굴도 만나리, 귀에 익은 목소리도 들리리.
이내 어둠은 옛날의 소꼽동무처럼 다가오고,
발길 따라 깊숙한 골목 여인숙 찾아 들어가면
눅눅하고 퀴퀴해서 한결 편해지는 잠자리.
꿈인 듯 생시인 듯 들리리, 네가 가 잠들 곳 또한
이같은 익숙한 곳 편안한 곳이라는 소리가, 먼데서.
- [2002 좋은 시/ 푸른사상]
‘루항요’는 오랜 방황 끝에 고향으로 돌아가는 여정을 그린 시입니다. 시인은 낯선 곳에서의 방황을 끝내고, 잊었던 옛 항구로 돌아가고자 합니다. 그곳에서는 익숙한 거리와 골목, 낯익은 얼굴들과 목소리를 만나며 편안함을 느낄 수 있습니다. 시인은 옛날의 소꿉동무처럼 다가오는 어둠 속에서, 자신을 환영해 주는 고향의 풍경과 사람들을 그리워합니다. 이 시는 고향의 따뜻함과 안정감을 다시 찾고자 하는 마음을 담고 있습니다.
‘가을비‘
‘가을비‘ - 신경림 시
젖은 나뭇잎이 날아와 유리창에 달라붙는
간이역에는 찻시간이 돼도 손님이 없다
플라타너스로 가려진 낡은 목조 찻집
차 나르는 소녀의 머리칼에서는 풀냄새가 나겠지
오늘 집에 가면 헌 난로에 불을 당겨
먼저 따끈한 차 한잔을 마셔야지
빗물에 젖은 유행가 가락을 떠밀며
화물차 언덕을 돌아 뒤뚱거리며 들어설 제
붉고 푸른 깃발을 흔드는
늙은 역무원 굽은 등에 흩뿌리는 가을비
- 시집<쓰러진 자의 꿈>.창작과비평사.1993
‘가을비’는 간이역의 쓸쓸한 풍경을 통해 가을의 정취를 그린 시입니다. 비가 내리는 간이역에서 손님이 없는 찻집, 차 나르는 소녀의 모습 등을 통해 고요하면서도 쓸쓸한 분위기를 자아냅니다. 시인은 집에 돌아가 따뜻한 차 한 잔을 마시며, 빗물에 젖은 유행가 가락과 함께 가을의 정취를 느끼고자 합니다. 이 시는 가을비의 소리와 냄새, 그리고 그 속에서 느낄 수 있는 소박한 행복을 담고 있습니다.
‘진눈깨비 속을 가다 ‘
‘진눈깨비 속을 가다‘ - 신경림 시
불빛 환한 방안에는 커피 향내 짙겠지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요정처럼 춤추겠지
진눈깨비 치는 어두운 밤길을
다리 절면서 사람들은 가고
젊은 부부 연속극 앞에 넋잃고 앉아 있을 거야
달콤한 대사에 눈시울들이 붉었을 거야
옷속으로 파고드는 매운 칼바람
여미는 손은 나무껍질처럼 갈라졌다
내일 모레가 설 선물 꾸러미도 챙겨야지
어린 시절의 이야기들 끝도 한도 없어
진창과 허방 끝없이 이어져
빠지고 고꾸라지면서 사람들은 절망하고
밤 이슥하면 사내들은 허풍을 칠 거야
짐짓 속아주면서 아내들은 즐거울 거야
천둥과 번개가 귀와 눈을 찢는
밤길은 갈수록 험하고 어두워
차도 바꾸고 집도 늘려야지
내년에는 괌으로 바캉스를 가야지
새벽은 언제 오느냐 좌절 속에
지쳐서 주저앉는 사람들 쓰러지는 사람들
불 꺼진 방안에는 숨소리들이 거칠겠지
사랑은 속될수록 즐거운 거니까
온몸에 감긴 시퍼런 멍
놀래대듯 그 위에 진눈깨비는 퍼붓고
평화롭겠지 이윽고 저 고른 숨소리들
모를 거야 밤길도 진눈깨비도 모를 거야
- 시집<어머니와 할머니의 실루엣>.창작과비평사
‘진눈깨비 속을 가다’는 겨울밤 진눈깨비를 맞으며 느끼는 다양한 감정을 그린 시입니다. 따뜻한 방 안에서의 커피 향과 아이들의 웃음소리, 그리고 진눈깨비 속을 걷는 사람들의 모습이 대조적으로 그려집니다. 시인은 매운 칼바람 속에서 옷을 여미며, 진창과 허방을 지나 절망과 좌절을 겪는 사람들의 모습을 그려냅니다. 이 시는 힘겨운 현실 속에서도 꿈을 잃지 않고 살아가는 사람들의 모습을 담고 있습니다.
신경림 시인의 시는 일상의 소소한 순간들 속에서 삶의 깊이를 느끼게 합니다. 그의 시는 인간의 고통과 슬픔, 그리고 그 속에서 발견하는 작은 행복을 섬세하게 그려내며, 독자들에게 깊은 공감과 감동을 선사합니다. 신경림의 시를 통해 우리는 일상의 소중함과 인간의 진정한 가치를 다시금 되새길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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