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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어원 상식

이순신 장군 충무공(忠武公)의 뜻과 시호, 호 덕암, 자 여해

by 하누혀누IT 2023. 10. 9.

목차

    이순신 장군 앞에 붙는 충무공(忠武公)의 뜻과 시호의 의미

    충무공(忠武公)이라는 호칭, 그 뜻은?

    한국 역사에서 가장 유명한 장군 중 하나인 이순신 장군의 이름 앞에는 '충무공'이라는 호칭이 붙습니다. 그러나 이 호칭의 뜻과 중요성을 정확하게 알고 있는 사람은 드물죠. 충무공(忠武公)이라는 단어에서 '충'은 충성, '무'는 무인(武人, 무사), 그리고 '공'은 공변할 공(功, 공적)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충무공'이라는 단어의 뜻은 '충성을 다하여 공을 세운 무사'를 의미합니다.

    이순신 장군은 임진왜란에서 뛰어난 지휘 능력과 전술로 큰 공을 세워, 이와 같은 시호를 받았습니다. 그러나 이순신 장군만이 '충무공'이라는 시호를 받은 것은 아닙니다. 한국 역사를 통틀어 '충무공'이라는 시호를 받은 장수는 총 11명이며, 이 중 5명은 임진왜란에서 활약한 장군들입니다.

    시호(諡號)란 무엇인가?

    시호는 사람이 사망한 후 그의 생전 업적이나 특징을 기리기 위해 부여하는 명칭입니다. 주로 왕이나 왕의 종친, 높은 관직의 문무관, 또는 특별한 공적이 있는 신하와 유학자에게 부여됩니다. 시호는 사람이 살아있을 때는 알 수 없으며, 사망한 후에 부여됩니다.

    시호와 유사한 개념으로 '묘호(廟號)'가 있습니다만, 이 둘은 다릅니다. 묘호는 왕이 사망한 후 종묘에 모신다고 할 때 붙이는 이름으로, 왕만이 받을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세종대왕의 묘호는 '세종'이고, 시호는 '장헌영 문예 무인 성명 효대 왕'입니다. 세종대왕처럼 업적이 특히 뛰어난 경우에는 시호가 길게 부여될 수 있습니다.

    왜 시호를 알아야 할까?

    시호를 통해 그 사람이 어떤 인물이었는지, 어떤 업적을 이루었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이는 역사를 이해하고 그 의미를 파악하는 데 중요한 단서가 될 수 있습니다. 특히 이순신 장군 같은 경우는 '충무공'이라는 시호만으로도 그의 충성과 뛰어난 무예, 그리고 이를 통한 공적이 얼마나 뛰어났는지를 짐작할 수 있습니다.

    시호는 고려와 조선 시대를 통틀어 다양한 인물들에게 부여되었고, 그 의미는 각기 다릅니다. 이를 통해 당시 사회의 가치관과 중요하게 생각하는 덕목을 엿볼 수 있습니다.

    '충무공'이라는 시호는 이순신 장군뿐만 아니라 다른 여러 장수에게도 부여된 명칭입니다. 이를 통해 우리는 그들의 업적과 덕목, 그리고 당시 사회의 가치관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시호는 한 사람의 생애와 업적을 요약하는 하나의 '키워드'라고 할 수 있으며, 이를 통해 역사의 깊은 층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됩니다.

    이순신 장군 트릴로지, 명량, 한산, 노량 죽음의 바다 포스터

    시호의 기원과 그 역사적 의미

    중국에서의 기원

    시호는 원래 중국에서 시작된 문화적 현상입니다. 그 기원의 시기는 명확하지 않지만, 일반적으로 주나라의 주공(周公) 시절부터 이러한 시호를 의논하여 정하게 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한국에서의 첫 시호

    한국에서는 514년 신라의 법흥왕이 즉위한 후, 그의 죽은 부왕에게 '지증(智證)'이라는 시호를 처음으로 추증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런 행위를 '증시(贈諡)'라고 합니다.

    시호 도감과 봉상시

    한국에서는 국왕이나 왕비가 사망할 경우 '시호 도감(諡號都監)'이 설치되어 시호를 신중히 정하게 됩니다. 일반 관리의 경우, '봉상시(奉上寺)'라는 관청에서 시호의 추증을 주관합니다.

    시호에 사용되는 글자

    시호에 사용되는 글자는 원래 194자로 한정되어 있었으나, 나중에 봉상시에서 107자를 추가하여 총 301자를 사용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실제로 자주 사용되는 글자는 대략 120여 자 정도였다고 합니다.

    시호의 목적과 선악의 구별

    시호를 내리는 목적은 단순히 공을 세운 사람에게만 부여하는 것이 아니라, 신하의 선악을 구별하여 후대에 권장과 징계를 전하기 위함이었습니다. 특히 악행을 일삼았던 사람에게는 '양(煬)', '황(荒)', '혹(惑)', '유(幽)', '여(厲)' 등의 시호를 내렸다고 합니다.

    시호의 중요성을 다시 한번 생각해 보다

    시호는 단순한 명칭 이상의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그것은 한 인물의 생애와 업적, 그리고 그 사람이 속한 사회와 문화에 대한 귀중한 정보를 담고 있습니다. 특히 한국과 중국과 같이 시호의 전통이 있는 나라에서는 이러한 시호가 역사와 문화를 이해하는 중요한 열쇠가 될 수 있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충무공'이라는 시호는 이순신 장군의 뛰어난 업적과 그의 시대에 어떤 덕목이 중요하게 여겨졌는지를 알려주는 중요한 힌트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시호는 오늘날까지도 우리에게 그 당시 사람들의 가치관과 업적을 이해하고 평가하는 기준을 제공합니다.


    이순신 장군의 호(號), 진짜와 가짜

    이 글의 초반에 이순신 장군의 '충무공'이라는 시호에 대해 설명했습니다. 그러나 이순신 장군을 지칭할 때 종종 사용되는 다른 이름, 즉 '호'에 대해서는 어떨까요? 일반적으로 "여해 이순신"이라고도 불리는 이순신 장군의 호에 대한 정보는 상대적으로 적습니다. '여해'는 자(字)이며, 이는 헌법재판소 재판관이 정리한 이순신 장군의 일대기 책의 제목 "여해 이순신"에서도 볼 수 있습니다. 호가 별명이라면 자는 이름에 해당하기 때문에, 여해 이순신이라고 부르기보다는 "이여해"라고 부르는 것이 옳습니다. 뭐 여해 이순신도 틀린 표현은 아닙니다. 하지만 호는 이덕암이라고 부를 수는 없기 때문에 덕암 이순신이라고 써야 바르게 쓰는 것이죠. 아니면 그냥 덕암이라고 불러야겠죠?

    잘못 알려진 이순신 장군의 호

    이순신 장군의 호로 잘 알려져 있지만 사실은 틀린 정보도 있습니다. 대표적으로 "덕곡(德谷)", "기계(器溪)", "백암(白巖)" 등이 있습니다. 이 정보들은 여러 출처에서 나오지만, 그 근거는 애매합니다. 위키백과에도 이순신 장군의 호가 '기계(器溪)', '덕암(德巖)'이라고 나와 있지만, 이는 사실을 정확히 반영한 것인지 의문이 듭니다.

    이순신 장군 호의 출처와 의심스러운 점

    '기계(器溪)'와 '백암(白巖)'라는 호는 이순신 장군을 연구한 김기환 선생의 1942년 출판한 "이순신세가"에서 처음 언급되었습니다. 김기환 선생에 따르면, 이순신 장군은 어린 시절 서울에서는 '기계'라고 불렸고, 아산으로 이주한 뒤에는 '백암'이라고 불렸다고 합니다. 그러나 이 정보는 그 이전의 기록에서는 나온 적이 없어, 김기환 선생의 창작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또한 '덕곡(德谷)'이라는 호는 소설 '임진왜란'의 작가 김성한 씨의 주장에 근거가 없는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이순신 장군 아호(雅號) 덕암(德巖), 그 진실은?

    1987년에는 경향신문의 유인석 기자가 이순신 장군의 아호(雅號)가 '덕암(德巖)'이라고 밝혔습니다. 이 정보의 근거는 '서원겸사기(書院兼史記)'라는 필서본(筆書本)에서 나온 것으로, '임진왜란록(壬辰倭亂錄)' 절의 '공신(節義功臣)' 편에 '중봉(重峯) 조헌, 천곡(泉谷) 송상현, 제봉(霽峯) 고경명' 등과 함께 '덕암(德巖) 이순신'이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로 인해 이순신 장군의 호는 '덕암'으로 알려지기 시작했습니다.

    이순신 장군의 호에 대한 정보는 여전히 불확실한 부분이 많습니다. 특히 이순신 장군에 대한 다양한 연구와 기록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정확한 호는 아직 명확히 밝혀지지 않았습니다. 덕암이라는 기록은 필사로 전해진 서원겸사기 임진왜란록의 한 구절뿐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이순신 장군의 호를 알고 싶다면, 다양한 자료와 연구를 꼼꼼히 살펴보고 판단해야 할 것입니다.

    충무공 이순신함. 이순신급함의 1번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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